유럽 스타트업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베를린

2016년 11월, 남성 패션지 아레나 옴므 플러스에 ‘베를린, 제 3의 로망’이란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브렉시트’가 터진 해였다. 혼자 살겠다고 선언한 영국에게 유럽연합EU은 관세 면제, 기업 감세, 세금 감세 등의 동맹국들간의 혜택을 거두기로 했다. 기업들은 하나 둘, 영국을 떠났다. 영국 공장 폐쇄를 결정한 닛산, 암스테르담으로 유럽 본사를 옮긴 파나소닉과 소니, 더블린과 룩셈부르크를 선택한 뱅크 오브 아메리카 메릴린치, JP 모건 등 외국 기업 뿐만 아니라 영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다이슨 또한 싱가포르로 옮겼다.
난감해진 것은 기업 뿐만이 아니다. 이제 막 꽃을 피우려던 신생 밴처 기업 ‘스타트업’ 또한 타격을 입었다. 더이상 ‘유럽 스타트업의 중심’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없게 됐으니까. ‘넥스트 시티’가 된 곳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다. 2017년 삼성의 혁신을 이끌고 스타트업 문화를 조성하는 ‘삼성 넥스트(전 삼성글로벌이노베이션센터)는 런던을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다. 영국의 가디언 지는 ‘베를린은 아직 충분치 않다. 하지만 삼성의 결정은 옳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유기농 먹거리 관련 스타트업들이 모이는 행사 ‘넥스트 오거닉’의 현장

국내에는 근래에 알려졌지만, 베를린은 꽤 오래전부터 전 세계 젊은이가 ‘로망’으로 삼고, 열광해온 도시다. 세 번의 ‘베를린 붐’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베를린은 ‘기회의 땅’이었고 새로운 독일을 꿈꾸는 젊은이가 전역에서 모여들어 허물어진 건물을 점령하고 테크노 파티를 벌였다. 두 번째 열풍은 2000년 초반에 불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클라우스 보베라이트가 (그 유명한)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을 때다. 별다른 산업, 경제 기반이 없던 베를린은 전략적으로 ‘아트 시티’를 표방했다. 통일 후 베를린에는 여전히 버려진 공간이 많았다. 베를린 시는 이를 아티스트들에게 제공했다. 기회는 외국인에게도 열렸다. 시는 비자까지 선뜻 내주며 외국인 아티스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저렴한 물가, 도시 전체에 흐르는 창조적 에너지에 반한 아티스트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왔다. 이내 베를린에는 6백여 개의 갤러리와 프로젝트 스페이스가 들어섰다. 1만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베를린에 아지트를 꾸렸다. 이는 당시 뉴욕보다도 더 많은 수였다.

“그때부터 쭉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쿨한 도시’로 통했어요.” 베를린 붐 1세대로 정착해 격동의 역사를 지켜본 독일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말했다. “매년 더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으로 이주해왔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젊은 사업가, 투자자들도 늘어났어요. 때마침 디지털을 비롯한 IT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어요. 이제 베를린은 또 다른 그림을 그려요. 바로 ‘유럽의 실리콘 밸리’죠.”

지금 베를린은 유럽 크리에이티브 신, 특히 ‘스타트업’의 중심으로 거듭나며 세 번째 붐을 맞이하고 있다. 베를린 시와 독일 연방정부는 스타트업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브렉시트 투표 직후, 독일 자민당은 런던 시내에 영국 스타트업들에 러브콜을 보내는 차량 광고를 내보내 영국 정부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전문가들은 5년 이내 베를린의 스타트업 규모가 런던을 제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브렉시트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런던 스타트업들이 금융과 기술을 결합한 ‘핀테크(Fintech)’ 분야에 집중했다면 베를린은 IT는 물론 패션, 음악, 음식,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회계 법인인 어니스트앤영은 베를린이 2014년 이후 20억 유로에 달하는 벤처캐피털 투자금을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이미 영국을 추월한 수준이다. 주택 관련 웹사이트인 네스트픽(Nestpick)의 조사에 따르면, 베를린은 2018년 밀레니얼 세대의 창업자들이 꼽은 가장 매력적인 도시다.

스타트업 캠퍼스인 팩토리베를린의 코워킹 스페이스

베를린 곳곳 1백 여개가 넘게 자리한 코워킹 스페이스가 그 열기를 증명한다. 베를린 관광청 관계자가 말했다. “현재 베를린의 슈퍼스타는 다름 아닌 젊은 스타트업 사업가들이에요. 이곳에서 그들은 할리우드 배우나 밀라노의 패션 디자이너와 같죠.”